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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명소

운산면 관광안내 관광명소
총 게시물 21 , 페이지 1 / 3
운산면 관광명소 목록 - 번호, 관광지명, 소개, 조회수 정보 제공
번호 관광지명 소개 조회수
21 국립용현자연휴양림 핫이슈  <소개내용>
 
 - 해발 678m의 가야산 줄기인 석문봉(653m), 일락산~상왕봉, 옥양봉~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사이에 있는 용현계곡 한가운데 자리해 심산유곡의 경치를
   자랑하는 산림휴양의 적지이다.
   
   능선을 따라 연결되는 등산로와 순환임도는 서산목장길과 연결되어 산책과 등산이
   용이하고 멀리 서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계곡물이 맑고 깨끗하며, 참나무류가 울창한 휴양림내에는 산림문화휴양관 등
   숙박시설, 숲속교실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
   보원사지와 개심사 등 백제후기 문화유산이 접해있어 서해안관광시대의 발달과 함께
   자연교육과 문화유적탐방을 겸할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용현이란 지명은 예로부터 강당을 설치하여 글을 가르친 곳이라 하여   “강당이마을”이
   라고도 불리 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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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미리 석불입상 핫이슈 지정번호 : 충청남도유형문화재 132호
지정년월일 : 1989. 12. 29
시대 : 미상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불상으로, 1970년대 지금의 위치
에서 1㎞ 떨어진 용장천 정비사업 때 하천에서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냇가에서 5㎞ 쯤 거슬러 올라간 상류에 2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떠내려 온 것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화강암으로 얼굴과 손등을 조각했으나 옆과 뒷면에는 거친 못 자국이 남았고 목이 부러져 있던 것을 접착한 흔적이 남아있다.
사다리꼴의 얼굴에 관을 쓰고 여기에 작은 부처를 새겼는데 심하게 닳아 있으며, 얼굴 바로 밑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고 옷은 왼쪽 어깨에서 걸쳐 내려와 형식적인 반원모양을 그리고 있다.

왼손은 치켜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받쳐들고 있는 형상으로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입체감이 없어서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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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명종대왕 태실 및 비 핫이슈 지정번호 : 보물1976 지정년월일 : 2018. 3. 26 시 대 : 조선 중종 33년(1538) 운산면 태봉리 태봉산 정상에 위치한 태실로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 (1534&#732;1567)의 태(胎)를 넣어둔 태실이다.  태실은 32개의 부채꼴로 된 화강석 판석을 깔아 8각 지대를 만들고 그 위 외곽에 8각 돌난간을 세우고 그 중앙에 종형(鐘形)의 태실과 태실 위에 팔각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태실의 서북편에 비석이 3기가 설치 되었는데 남쪽에 설치된 비가 태실을 표시한 비로 '대군춘령아지씨태실'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연대는 명종이 태어난 4년 후인 중종 33년(1538) 2월 2일이며, 북쪽에 설치된 비는 '왕자전하태실'로 숙종37년(1711)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는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로 조성되었다. 명종대왕의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채 방치되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  태실 전체 높이는 273㎝(태실높이90㎝)이고 주상전하태실비는 64×26×123㎝, 대군춘령아기씨비의 전체높이는 153㎝이다.  3669
18 문수사금동여래좌불상 핫이슈 지정번호 : 충청남도유형문화재 34호
지정년월일 : 1974. 9. 1
시대 :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40번지에 위치한 문수사의 극락보전 내에 봉안된
금동여래좌불상으로 앉은 높이 70㎝, 무릎 폭50㎝ 이다.
이 좌불상은 고려 제 29대 충목왕 2년 (1346)에 조성된 단아한 금동불좌상으로 장곡사금동약사불좌상(보물337호)을 비롯한 고려 후기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 가늘고 적정한 눈 오똑한 콧날 미소를 머금은 단정한 입 등 섬세한 표현이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균형 잡힌 체구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손모습 등 신체는 현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신체의 특징 뿐 아니라 적절하게 가해진 옷주름 왼쪽 팔꿈치의 Ω자형 주름과 가슴의 승각기와 띠매듭 등 모든 점에서 장곡사 불상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성연대도 같고 또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같은 조각가의 작품이거나 혹은 동일 유파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1973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문수사금동불좌상의 복장 조사에 불상 조성기와 제작연대는 물론 불상 조성에 관련된 300여명의 인물 등이 밝혀졌다.
또한 복장유물로 구역인왕경(舊譯域仁王經)과 의천속장경판기 등이 발견되어 이들은 모두 국문학사, 인쇄발달사, 복식사 등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고려 조각사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문수사 불상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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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수사 극락보전 핫이슈 지정번호 : 충청남도유형문화재 13호
지정년월일 : 1973. 12. 24
시대 :

문수사가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3년 극락보전의 금동여래좌상에서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든 문서가 발견되어,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인 극락보전도 고려시대에 세워지고 조선시대에 다시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앞면과 뒷면의 기둥 사이마다 2개의 공포를 배치했으며 옆면에는 공포를 두지 않아서 맞배지붕 건물의 일반적인 옆면 설계방식을 따르고 있다.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달았다.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아서 의식을 행할 때나 도를 닦는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극락보전은 조각수법이 매우 수려하고 웅장하며, 여래상을 비롯하여 삼세불상과 나한상, 각종 탱화 등 많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 세부사항보기
문수사는 운산면 상왕산 서편아래 태봉리에 위치한 고사찰로 1973년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극락보전내에 안치된 금동아미타좌불상을 조사 중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한 발원문(發願文)의 명문에 고려 충목왕2년(1346)이란 기록문이 나와 적어도 고려 충목왕 2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극락보전은 사찰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구전(口傳)과 건축
양식으로 보아 본래의 건물은 없어지고 금동불상만 따로 간직되어 오던 중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새로 건립하여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보전내에 현존한 탱화의 조성연대를 살펴볼 때 지장보살도는 영조
50년(1774)에 조성되었고 신장탱화와 후불탱화는 1892년, 칠성탱화는 1905년에 각각 조성된 것으로 보아 임란 이후에 중건되어 조선후기까지 불화를 계속해서 조성한 것으로 보여진다.

극락보전의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4칸 겹처마 맛배지붕집이며 공포는 다포건물이다. 측면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았으며 2개의 고주를 세웠다.

석조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사용했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상부에 창방을 얹고 내외 2출목의 공포를 배치했으며 기둥 사이의 공간포(空間包)는 2개씩이다.

건물 외부공포의 우설 사이에 연꽃을 조각하여 장식하고 내부는 운궁형을 이루고 있는데 끝부분이 길게 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앞뒤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고 있는데 종량 하단에 우물천정을 가설하여 그 위에 가구재를 감추게 했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칸에 불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하였다.
특히 내부의 닫집과 단청문양은 건축당시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단청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3칸(10m), 측면3칸(6.6m)이며, 총면적 6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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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문수사 핫이슈 문수사의 확실한 창건연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지만 1973년에 극락보전내에 안치된 금동여래좌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서 고려제29대 충목왕2년(1346)이란 기록이 있어 고려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한편 발원문 발견시에 생모시, 단수포, 쌀, 보리 등 600여 점이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극락보전은 주심포식과 다포식을 절충한 아름다운 건물로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조용한 산사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봄철에는 주위의 산과 목장에 벚꽃과 야생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 세부사항보기
운산면에서 해미면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태봉리 마을에 조그만
사찰이 있는 데 이것이 문수사인데, 2m 높이의 작은 석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극락보전, 좌우에 요사체가 배치되었는데 문수사의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에서
고려 충목왕2년(1346)에 만든 문서가 나와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곳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16나한상, 조선 영조 50년(1774)에 제작된 지장보살도, 1892년에 제작된 제석, 천룡도, 삼불회도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삼층석탑 등 소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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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개심사 심검당 핫이슈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358호
지정년월일 : 1997. 12. 23
시대 : 


보물 제143호 개심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서편)에 건립된 심검당은
그 건축 년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정확한 년대를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성종실록에 성종 6년(1475) 6월에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이 가야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어 개심사의 건물이 화재로 전소된 것을 성종15년(1484)에 대웅전을 비롯 건물을 중창했다는 기록과 1914년도에 대웅전 건물을 해체 보수당시 마루도리 속에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심검당 건물도 이때 같이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심검당의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화강석재를 견치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주두(柱頭) 위에 공포(供包)를 짜올린 주심포계(柱心包系) 양식이며 가구는 5량집이다.

초제공 밑 주두 아래로 운각(芸閣)을 한 보아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익공계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초제공과 2제공 뿌리는 앙설로 되어있고 3제공만이 초각되었다.

신검당의 평면배치는 정면3칸, 측면3칸이며 건물의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5칸의 덧집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건물 총면적 : 111.4m2(심검당 63.2m2 , 덧집 48.2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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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개심사 명부전 핫이슈 지정번호 : 충청남도유형문화재 34호
지정년월일 : 1984. 5. 17
시대 : 


개심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우측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목조 건물로 개심사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고종 26년(1889)에 죽포 김설제(竹圃 金設濟)가 작성한 개심사 중창 수리기의 내용에 '순치삼년명부전신설' 이란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인조 24년(1646)에 신축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기단은 다듬은 돌로 가지런히 쌓았고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에 단층,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건물 내부의 가구는 무고주 5량으로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이
넓은 편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평주에 걸친 대들보 위에 익공형 화반(花盤)을 얹고 화반 위에 장혀와 중도리를 놓은 다음 충도의 사이에 종량을 걸치고 그 가운데 키가 큰 화반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지장십왕상을 모신 불단은 ∩형이며 출입문 좌우에 사자상을 세워 명부전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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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개심사영산회 괘불정 핫이슈 지정번호 : 보물1264호
지정년월일 : 1997. 8. 8
시대 : 조선 영조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

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 세부사항보기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비로사나불이 협시하였으며 그 밖에는 두광에 칠화불과 신광에 팔화불, 제석과 범천, 그리고 상단부에 육분신불을 배치함으로써 복잡한 군도형식에서 벗어나 횡렬로 배치된 구도이다.

권속들은 보살과 제자상 그리고 사천왕상이 생략되었지만 많은 화불과
십방제불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인 석가불의 형상은 원형 두광에 키형 신광을 갖추고 서 있는 상으로 화면 가운데 크게 묘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한다.

사각형의 얼굴은 중후하나 살찐 두 어깨에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 등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윤곽선으로만 표현된 나발, 옆으로 퍼진 육계에 정상계주와 중앙계주를 표시하였고 반쯤 뜬 눈 역시 형식적이다.

법의는 한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법의를 입었으며 법의 안에는 꽃문양으로 장식된 하의와 보상화문과 도형문양이 조화되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키형 신광 안에는 모단당초문과 연화의 변형된 꽃문양이 가득차게 그려져 현란해 보인다.

노사나불과 비로사나불의 위치가 바뀌어졌는데 도상의 혼란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사나불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 부근에 들어올려 설법인을 취하고 앉아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며 역시 비로자나불도 지권인(智拳印)을 한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는 또한 그 크기가 본존보다 유난히 작게 모사한 점은 충남 공주군 마곡사 괘불 등에서 볼 수 있는 도상이다. 모두 이중윤광을 지고 상단 좌우 끝편에 배치되어 본존불을 강조하였다.

본존불 두광에 화도문으로 장식하고 거기에 칠화불을 봉안했는데, 모두
이중윤광을 지고 통련외 법의를 입었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형상인데 각기 지물과 수인을 달리 하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약합, 금강저, 선정인, 설법인, 연화, 지권인, 변형된 설법인을 하고 있다. 이들의 존명은 알 수 없으나 다보여래, 보승여래, 묘색신여래, 광법신여래, 이포의여래, 감로왕여래, 아미타여래 등 칠여래로 보여지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7화불의 이중윤광 위로 서운(瑞雲)을 각기 방향에 따라 묘사하고 사이사이에 본존불 정상계주에서 흘러 나오는 흰 연기와 보주가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키형신광에서도 바깥테두리를 화염문으로 장식하고 거기에 팔화불을 묘사하였다. 이중윤광을 지고 통견의법의를 걸치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은 두광의 화불과 같으나 크기가 조금 다를 뿐이다.

오른쪽 위로부터 설법인, 금강저, 선정인, 약합 그리고 왼쪽으로부터 설법인연화, 변형된 설법인, 선정인 등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칠여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지나, 좌우대칭의 배치 구도상 한 여래가 더 보태진 것으로 보여진다.

신광 제일 밑 부분에 서 있는 상은 제석과 범천으로 원형두광과 키형신광을 지고 보존을 향하여 합장한 자세이다. 형상은 보살의 전형적인 모습인 화관에 천의를 입고 있으나 지물을 들고 있지 않고 합장한 모습으로 보아 문수와 보현보살로 보여지지 않고 제석과 범천으로 추정된다.

상단 위에서 3구의 십방제불이 배치되어 있는데 배경은 오색의 서운으로 감싸고 있어 장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하단 좌우 끝에 2송이의 대형 연화도 장엄한 분위기를 더운 살려주고 있다.

이 괘불은 18세기 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즉 괴량감을 느끼게 하는
얼굴과 비대한 신체가 보여주는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도안화한 문양에서 이 시대의 불화보다는 수법이 떨어지나 홍색의 주조색과 녹색 두광, 의습에 보이는 강렬한 색조의 대비가 어우러져 화려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화기에 의하면 주상전하 왕비전하가 그리고 세자저하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고 우운당 대선사가 증명하고 화사는 유성 등 11인의 승려가 건융 37년(1772)에 대영산괘불정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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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개심사 대웅전 핫이슈 지정번호 : 보물143호
지정년월일 : 1963. 1. 21
시대 : 조선 성종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해에 해당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 세부사항보기
개심사는 가야산(667.6m) 줄기의 상왕산(307.2m) 기슭에 자리잡은 고사찰로 문헌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확실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개심사에 전해지는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심사의 본전인 현재 대웅전 건물의 건축년대는 성종실록 56권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6년(1475)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이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 개심사가 전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14년에 대웅전 해체 보수 당시에 마루도리 받침 장혀속에서 ’조선성종조 성화 이십년 갑진 6월 대웅전중창’이란 묵서명이 발견되어 현재의 대웅전은 성종 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9년이 지난 성종 15년(1484)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창건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높은 화강석 기단 위에 남향하여 다포계와 주심포계를 절충한 단층 겹처마 맛배 지붕집이며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특히, 양편 끝기둥을 귀솟음과 안쏠림 수법을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착시현상의 교정이 잘 이루어진 건물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면적은 88m²(27평)이다.

가구는 2고주 9량이며 건물의 앞뒷면 상부에만 다포계의 공포를 바깥쪽에 2출목, 내부쪽에 3출목으로 짜 올렸고 측면에는 공포가 없다. 특이한 점은 전형적인 조선초기의 다포계 건물이면서도 마루 대공과 중도리를 떠받치고 있는 합장(合掌)은 주심포계 가구방식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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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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