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명유래

운산면 운산면소개 지명유래

운산면은

조선시대 4개의 주군현에 소속해 있던 서산시지역에서 연혁이 가장 복잡한 면이다.
해미현 이도면 지역이었던 현 안호리, 수평리, 팔중리, 고산리, 용현리 2리, 고풍리, 수평리, 용장리, 갈산리 등과 서산군 지역이었던 현 신창리, 용현리 1리, 태봉리와 그리고 원벌리, 소중리, 가좌리의 일부가 이에 해당된다.
또 홍주목 운천면지역이었던 곳은 현 상성리, 거성리 그리고 원벌리, 소중리, 가좌리의 일부가 이에 해당된다.
또 현 와우리는 면천군 마산면 율사리와 덕산군 외야면 슬치리 지역이었다.
현 원평리는 홍주목합북면 원당북리와 원당남리 그리고 영산곶리로 되어 있었다.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옛 홍주목 운천면은 해미군 운천면으로 되고 옛 서산군 동음암면 지역과 덕산군 외야면 그리고 면천군 마산면 지역이었던 곳 등을 모두 합하여 해미군 부산면으로 만들었는데 이때에 부산면이란 면 명은 옛 동음암면 소속이었던 부산리의 이름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산리의 이름은 현 음암면 부장리의 망재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산면내에 있었던 상징물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운천면, 부산면, 이도면 등 3개 면을 합하여 한 면으로 만들면서 운천면에 운자를 취하고 부산면에서 산자를 따서 서산군 운산면이 되었다.
운산면은 가야산을 대부분 점하고 있어서 면명이 구름 속에 있는 산이란 뜻으로 이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지만 가야산과는 전연 관련이 없이 생겨난 것이다. 가야산은 내포지방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대단히 중요한 산인데 그 대부분을 운산면이 점하고 있다.
면명이 가야산에서 연유된 것은 아니지만 높은 것을 뜻하는 구름 운자로 되어 있어 우연이지만 지역의 형승에 꽉 맞아 떨어지는 이름이다.
운산면은 석가모니불이 성불한 불교의 성지 ‘부다가야’에서 유래된 가야산을 관할하는 관계로 국보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을 비롯한 문화재와 문화 유적들이 수도 없이 많은 지역이다.
1973년 7월 1일 에는 당진군 정미면 소속으로 있던 여미리가 운산면으로 편입되었다.
운산면에는 용장리, 갈산리, 여미리, 안호리, 수당리, 수평리, 고산리, 팔중리, 와우리, 원평리, 고풍리, 용현리, 태봉리, 원벌리, 거성리, 신창리, 상성리, 가좌리, 소중리 등 19개리로 되어있다.

지명유래 - 운산면 지명유래입니다.
마을명 마을유래
용장리 용장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장항리 묵현리 장평리 숙용평리 등으로 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이지역이 숙용평리 장항리 묵현리 장평리 외에 용연리 미를리 중리등 3개마을이 분할되어 7개 마을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7개의 마을을 한동리로 만들면서 용연리의 용, 장항리의 장자를 따서 서산군 운산면 용장리가 되었다.
갈산리 갈산리는 조선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회선동리와 좌세리로 되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갈현리, 회선동, 산지동, 좌세리 등 4개리로 분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4개의 마을이 합쳐지면서 갈현리에서 갈자를 취하고 산지동에서 산자를 따서 서산군 운산면 갈산리가 되었다.
여미리 여미리는 조선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여미리였다.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여미리와 리문리로 분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다시 두동리가 합쳐져서 서산군 정미면 여미리로 되었다.
1957년 11월 20일 정미면이 당진군에 편입되어 당진군 정미면 여미리로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에는 여미리로 분리되어 서산군운산면여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미리라는 이름은 마을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에 존재했던 부족국가 시대 염로국으로 시작된 것이다.
안호리 안호리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안호리라는 이름으로 일관해왔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리라는 마을이 분리되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안호리와 수리가 다시 한동리가 되면서 서산군 운산면 안호리가 되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마을 앞에 큰 방죽이 있어서 이로 인하여 안수리로 불린때도 있었으며 겨울이 되면 이 호수위에 기러기떼들이 이방죽에 날아와 겨울을 지내다가 돌아가는 철새 도래지여서 안호리라 했다는 주장이 있다.
수당리 수당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장생동리의 일부분이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묵리, 묵당리, 와평리, 장승동리, 하장리 등 5개리로 분할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시 와평리, 장수동 등은 수평리가 되고 상흑리였던 상묵당리, 묵당리였던 하묵당리, 하장리, 하장수동리를 합쳐 하장수동리의 수자를 취하고 묵당리의 당자를 따서 서산군 운수면 수당리가 되었다.
1895년 하장동이라 이름한 것은 조선시대까지 한마을이었던 장생동리내의 아랫마을이었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모두가 장수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상묵당리는 현재 동방맥이 산제를 올리는 곳에 있었다. 그래서 옛 산제당을 묵당이라 불러서 묵당리라 한 것으로 보인다.
수평리 수평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장생동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와평리, 상장수동, 상묵당리,하묵당리, 하장수동이 분리되었다.
1914년 행정국역 개편시 와평리, 상장수동과 고음곡리의 일부를 합쳐서 상장수동에서 수자를 취하고 와평리에서 평자를 따서 서산군 운산면 수평리가 되었다.
고산리 고산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고음곡리와 수철점리였다.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수철점리가 없어지고 고음곡리가 두산리로 바뀌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시 고음곡리 일부는 수평리로 분할되고 남은일부와 두산리를 합하여 고음곡리에서 고자를 취하고 두산에서 산자를 따서 서산군 운산면 고산리가 되었다.
고산리는 수평천의 원류점이라 할 수 있는 팔중리에서 수당리까지의 연속되는 계곡의 일부라 할수 있지만 바로 접해있는 수평리보다는 위쪽에 위치해 있음에도 골이 넣게 퍼져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운산면내 전체에서도 예부터 살기좋은 곳으로 인정받아 왔던 곳이다.
팔중리 팔중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팔골리와 중산리로 되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중산리에서 이티리가 분할되고 팔골 리가 팔곡리로 바뀌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시 팔곡리, 이티리, 중산리등 3개마을이 합쳐 한마을이 되면서 팔곡리의 팔, 중산리의 중자를 따서 서산군 운산면 팔중리가 되었다.
와우리 와우리는 조선시대에는 덕산군 외야면 슬치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우현리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면천군 마산면 울사리 일부를 합하여 한동리를 만들면서 소가 누운 고개라는 이름을 취하여 서산군 운산면 와우리가 되었다.
원평리 원평리는 조선시대에는 홍주목의 월경비입지로 홍주군 합북면 북원당리, 남원당리, 영산곳리 등 세마을로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원평리, 원상리, 의현리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서산군 운산면 원평리가 되었다.
원평리는 옛날4개로 교차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산지방에서는 가깝게는 당진군 면천, 합덕지방의 예산군의 봉산, 고덕, 덕산, 멀게는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원평초등학교 자리에 원집이 있어서 이를 원당리라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고풍리 고풍리는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고색리와 군장동리로 있었다.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 시 군자동, 운곡리, 무릉동, 고색리등 4개마을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이 4개의 마을을 한 마을로 만들면서 고색리의 고, 풍년의 풍자를 넣어 서산군 운산면 고풍리가 되었다
용현2리 용현리2리는 국보 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사적지 316호인 보원사지가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강당리로 있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시 용현1리와 합치면서 용현리가 되었다.
이곳의 옛 지명인 강당동은 우리 한문학의 개산시조로 불리우는 고운 최치원이 893년에 7년간의 부성태수(서산군수에 해당)직을 마치고 가야산 산중에 위치한 용현리에 강당을 마련하고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데서 연유된 것이라 전해온다.
호산록불우조에는 강당사는 일명 보원사라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용현1리 용현1리는 조선시대에 서산군 동음암면 갈동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해미군 부산면 갈산동, 보현동, 태봉동, 벌리 등 4개리로 분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갈동과 보현동과 옛 홍주목 운천면 소속이었던 거산리의 일부, 해미군 이도면 강당리까지 합하여 갈동내에 있던 자연마을 이름인 용비동에서 용자를 취하고 보현동의 현자를 따서 용현리가 되었다.
태봉리 태봉리는 조선시대에는 서산군 동음암면 갈동과 홍주목 운천면 장동 지역에 속해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서산군 동음암면 소속이었던 갈동이 해미군 부산면 소속으로 바뀌고 마을도 갈동, 보현동, 태봉동등 4개마을로 분할될때 이 지역은 해미군 운천면 장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태봉동과 해미군 운천면 장동의 일부를 합하여 한 마을로 만들면서 서산군 운산면 태봉리가 되었다.
원벌리 원벌리는 조산시대에 홍주목 운천면 벌리였다.
1895년 행중구역개편시 벌리, 원금리, 장동으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벌리, 원금리, 장동을 합하여 원금리의 원, 벌에서 벌자를 따서 원벌리가 되었다.
신창리 신창리는 조선시대에는 서산군 동음암면 개심동리, 고창동리, 벌리로 되어있었다.
이중 벌리는 현 원벌리의 전신인 홍주목 운천면 벌리와는 이름이 같아서 같은 마을로 혼동하기 쉬운데 그 위치는 서로 아주 다른곳이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해미군 부산면 고창동 동신리, 벌리 등으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고창동, 동신리, 벌리 등을 합하여 한동리를 만들면서 동신리에서 신자를 취하고 고창동의 창자를 따서 서산군운산면 신창리가 되었다.
거성리 거성리는 조선시대 홍주목 운천면 하성산리와 거산리, 그리고 서산군동음암면 동거리, 서산군동암면 대교리 지역에 있었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홍주목 운천면 지역은 해미면 운천면 상성리, 거산리, 하성리로 분할되고 동음암면 동거리는 해미군 부산면 동산리, 관기리, 동거리로 분할되었다 또한 서산군 동암면 대교리는 유산리, 기촌리, 석천리, 석정리로 분할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시 해미군 운천면 하성리, 동산리, 거산리와 해미군 운천면 관기리, 서산군 동암면 석천리 일부가 합쳐져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가 되었다.
상성리 상성리는 조선시대에 홍주목 춘천면 상성리였다.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 시 해미군 운천면 상성리 , 성중리, 중리, 소동 등 4개마을로 분할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시 상성리, 성중리 등 두 동리과 소동의 일부를 합하여 한 마을로 만들면서 상성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홍주목 운천면 소속으로 홍주목의 월경처였다. 또한 운산면내에서는 가장 넓은 평야의 농촌마을이다.
소중리 소중리는 조선시대에는 서산군 동음암면 동거리와 홍주목 운천면 상성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동거리가 해미군 부산면 소속으로 바뀌고 동거리가 동거리와 신기리로 나뉘었다. 홍주목 운천면 상성리는 상성리, 성중리, 중리, 소동으로 나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는 해미군 부산면 동거리와 해미군 운천면 중리를 합한외에 해미군 운천면 소동의 일부를 합하여 한동리를 만들면서 소동에서 소자를 취하고 중리에서 중자를 따서 서산군 운산면 소중리가 되었다.
가좌리 가좌리는 조선시대에 홍주목 운천면 가좌동리와 서산군 동음암면 남당리로 있었던 곳이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가좌동리는 해미군 운천면 상가리, 상리로 나뉘고 남당리는 변함이 없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상가리, 상리 남당리를 합친외에 서산군 동음암면 고양동리의 일부를 합쳐서 한마을을 만들면서 조선시대 홍주목 운천면 좌동리에서 이름을 딴 서산군 운산면 가좌동리가 되었다.

출처 : 서산의 지명사(2008.11발간) 저자 이은우

담당부서 정보

  • 컨텐츠 담당 : 운산면
  • 연락처 : 041-660-3526
  • 최종수정일 : 2023.07.25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