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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대산읍 대산읍소개 지명유래

대산이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큰 산(大山)이라는 한자의 어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1619(광해군 11)년에 간행된 호산록(湖山綠) 산천조에서 ‘대산(大山)! 그 산은 바다 가운데 꿇어 앉은 듯하고, 맑은 날에 산 정상에 오르면 먼 곳까지 잘 보인다.’라고 하여 이는 큰 산과 연관하여 대산의 연원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대산은 망일산(望日山)으로, 망일산은 서산의 서북부 지역에서 높이 우뚝 솟아오른 해발 302m의 산이다.

이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계가 탁 트여 공군 레이더 기지가 자리할 만큼 좋은 입지적 여건을 갖추고 있어 위용과 기품이 있는 명산이다. 이로써 큰 산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망일산에 연유되어 대산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산이란 지명이 문헌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태종실록 1412년(조선 태종 12)년 8월 20일 3 번째 기사에 ‘배를 잘 관리하지 않은 충청도 대산만호(大山萬戶) 박의손(朴義孫)을 논죄하다.’ 라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 1426년(세종 8) 8월 16일 정축조에 충청도 감사와 절제사가 합동하여 아뢰기를 "도내에 있는 서산의 다리곶, 흥양, 토진, 맹곶 등 네 개의 목장을 친히 답사하여 살펴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 – 중략 – 대산곶은 수초가 풍부하고 목장 축 조하는 공역도 편리하게 되었으니 – 중략 – 큰 말은 대산곶에 방목하고 작은 말은 흥양곶에 방목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어 관명으로, 또는 지명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대산!하면 느낌이 좋은 듯하다. 사용하기 시작한 역사도 길고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것은 대산이란 이름이 바뀐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산이 대산면으로 오랫동안 지내오다가 대산읍으로 승격된 것은 1991년의 일로써, 당시 축제분위기였다. 읍 승격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임해공단과 대산항만, 자원비축기지가 건설되는 등 많은 발전을 가져와 원유정제와 석유화학 제품 생산, 물류 수송과 자원비축 등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환태평양 시대를 주도하는 임해관문의 물류 거점지역으로 도약하고 있다.

마을의 지명유래 - 대산읍 지명유래에 관한 자료이며 마을명, 마을의 지명유래 내용을 보여줍니다.
마을명 마을의 지명유래
대산리(大山里) 대산리는 읍소재지에 위치한 구진(舊鎭)을 중심으로 정자동과 원두골, 매남리와 각골 등의 일원을 말한다. 구진은 파지도만호진이 주둔했던 유서깊은 곳으로 여지도서에 의하면 금생동리(金生洞里)와 마남리(馬南里)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금생동 일부(각골)와 정자동, 원두골, 매남리를 합쳐 산전리(山前里)로 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폐 목장지역에 새로 생긴 로상(路上), 로하(路下) 양 리의 일부와 산전리 일원을 전부 통합하여 대산면 대산리가 되었다. 1991년 12월 1일 대산면이 대산읍(大山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대산읍 대산리가 되었다. 대산리의 지명 유래는 대산이라는 글자 그대로 큰 산에 관련된 이름으로 동쪽에 우뚝 솟은 대산의 명산 망일산(望日山)에 연유되어 얻어진 이름이다. 대산리는 8개 리로 분리되어 있다.
대로리(大路里) 대로리는 광암, 물안이(명지), 영좌목골 등의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어, 현재 행정구역이 대로 1·2·3리로 되어 있다. 조선조 말까지 대로리라는 이름이 없었고 행정구역상 현 대로1리는 마남리, 2리는 기은곶리, 3리는 기은곶리와 평신리(반곡리)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에 1426년(세종 8)에 조성된 목마장이 1794년(정조 18)에 폐지되면서 당시 정자동에서 원두골 – 각골 – 명지서낭당 – 방고개로 이어지는 도로를 기준으로 남쪽은 로하리, 북쪽은 로상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로상리·로하리·기은리·반곡리 등의 일부 지역이 병합되어 대로리가 되었다.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글자 그대로 큰길이 있음으로 이에 연유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다른 리명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행정구역개편 때에 이루어진 합성명칭이 아닌 새로 얻어진 리명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광암은 인심이 후덕하고 자애로우며, 어염시수(魚鹽柴水)가 풍부하여 옛날부터 사람살기 좋은 곳이었다. 물안이는 자연수의 용출로 물이 많아 생긴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1956년에 명지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크게 발전하고 있다.
웅도리(熊道里) 웅도리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지곡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대산면에 편입되어 대산면 웅도리가 되었다. 웅도리는 가로림만 내해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대산읍의 7개 도서 중 유일한 유인도이다. 섬의 모양이 곰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곰섬이라 하는데, 대로1리를 경유하여 썰물 때 유두를 건너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웅도리에는 현재 동편말, 큰말, 큰골, 장골 등의 자연마을에 3개 반이 있다.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이 곳은 섬이지만 농경지가 많아 주곡을 자급자족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오지리(吾地里) 대산읍의 서북단에 자리하고 있는 가로림만과 분줄만 사이에 서북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반도로 형성되어 있다. 벌말 해안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음력 3월에 소금풍년을 기원하는 벗 고사를 지내고 소금을 많이 구워 국가재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 광복 후에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100여 ha의 많은 염전을 개발하여 양질의 천일염을 생산함으로써 이 고장의 산업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부터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오지리의 오자를 까마귀오(烏)를 쓰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나 오(吾)자로 고쳐 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지리는 1895년과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도 다른 지역과 병합되지 않고 단일 리로 존속해 오고 있다. 그리고 오지리의 유래를 살펴보면 오지리에는 검은곶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는데 검은이란 어원에서 까마귀 오자를 써서 오지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면이 바다와 접하고 있어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을 겸하고 있는데, 벌천포와 고창개 연안에 어장이 형성되어 있어 다양한 해산물의 채취로 생활이 풍족한 편이다. 그리고 최근에 벌천포 해수욕장이 개장되면서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와 관광지로 변모해 가고 있다. 1974년에 오지1·2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은리(其隱里) 기은리는 등기산 서쪽에 자리한 기은곶이와 그마재 등의 중심마을로 형성되었다. 이 곳에는 대산지방해양항만청과 대진초등학교가 있고, LG화학 사원아파트가 자리하고 있어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선진지역으로 발전되고 있다. 기은리는 1765년(영조 41)에 간행된 여지도서(與地圖書)를 보면 독곶리가 포함되어 기은곶리(其隱串里)로 표기 되어 있다. 이후에 간행된 호구총수 서산군편에서 1789년 기준 리 편제를 보면 기은곶리와 독곶리로 분리되어 있어 이 무렵에 독곶리가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다시 현 대로2리 일부 지역이 분리되었는데, 이 때 기은곶리에서 곶(串)자가 빠진 대산면 기은리가 되었다. 그리고 기은리라는 지명 유래는 당초 독곶 지역과 통합되었을 시, 마을의 지형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고, 서쪽으로 돌출되었으므로 ‘긴 곶’이라 하였다. 이 ‘긴’자가 발음상의 변화에 의해 기인에서 기은(其隱)으로 변하여 기은곶이 되고, 이어 지응고지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현재 기은리는 1·2리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있다.
독곶리(獨串里) 독곶리는 서해에 접해있는 반도로 20여년 전까지도 오지(奧地)의 상징으로 불러져 왔던 지역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석유화학공단을 조성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흥공업지대로 변모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박정희대통령이 독곶리 해역을 시찰하면서 도로가 확·포장되고, 공단건설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는 경관이 아름다운 황금산이 있는데, 조선조 초기에 이 산 아래에 만호진이, 1705년(숙종 31)에는 첨사진이 설치되어 해안을 방어하던 군사요충지였다. 독곶리는 조선조까지도 기은곶리에 포함된 곳으로 독립된 마을은 아니었으나 여지도서의 1789년 당시 리 편제 현황에 처음으로 독곶리가 나와 이 무렵에 독립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는 소금을 생산하여 국가 재정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광복 이후에도 많은 염전이 개발되어 천일염 생산에 주력하였다. 이 마을은 화염을 생산하던 곳이라 목벗(項筏), 샘벗(泉筏) 등과 같은 염벗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독곶리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의 형태가 반도이고, 바다에 돌출된 곶(串)으로 되어있는데, 안에 들어가서는 넓게 펼쳐져 있는 데에 연유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대죽리(大竹里) 대죽리는 1765년(영조 41)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1759년 당시 리 편제를 보면 죽엽리(竹葉里)로 되어 있다. 이후 충청도읍지와 1871년에 편찬된 호서읍지에 죽엽리와 대각리(大角里)로 되어 있어 이 시기에 죽엽리에서 대각리가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2개 리를 통합하고 대각리의 ‘대’자와 죽엽리의 ‘죽’자를 따서 대죽리가 되었다. 이후 1946년에 다시 1·2리로 분리되었다 대죽2리 지역에 유입인구의 중가로 1980년 녹와니 지역이 3리로 분리되었고, 이후 2리에 정유공장이 건설되면서 마을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그리고 대죽3리 녹와니 지역에 충청남도 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곳 주민들이 이주를 함으로써 2002년에 잔여세대가 대죽2리에 통합되어 현재 행정구역이 대죽1·2리로 되어있다. 옛날부터 죽엽리는 사람 살기 좋은곳이라 알려져 왔는데, 이것은 이 지역이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비옥한 토지와 천혜의 어염시수(魚鹽柴水)가 풍부하고 사람들의 성품이 후덕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바다를 매립하여 농토를 넓히고, 염전을 개발하여 소금을 생산해 각광을 받던 곳이기도 했다.
화곡리(花谷里) 화곡리는 대산읍의 북단에 있는 지역으로 반곡리, 개화리, 삼길포 등 3개의 중심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삼길포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인천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취항하였고, 한때 실치(뱅어)잡이로 성황을 이룬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평신리(平薪里) 또는 평신진리(平薪鎭里)라 하였는데 이곳에 평신진이 있었다. 평신진은 1711년부터 184년간 종3품의 첨사(僉使)가 근무하던 중요한 군사요지였는데 군사권은 물론 목장관리까지 맡은 겸목관 체제였다. 평신진지 주변에는 선정을 베푼 첨사들의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고, 반곡마을에는 진 터임을 알 수 있는 성벽이 남아있다. 1895년(고종 32)년에 단행된 행정구역 개편에서 개화리(開花里)와 반곡리(盤谷里)로 분리되었다. 다시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개화리와 반곡리 일부를 통합하였고, 일부는 대로리에 편입되었다. 이때 개화리의 ‘화(花)’자와 반곡리의 ‘곡(谷)’자를 따서 대산면 화곡리가 되었다. 이후 화곡 1·2·3리로 분리되었다가 1966년 다시 하나로 통합된 후 또 다시 1974년에 3개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운산리(雲山里) 운산리는 망일산 동편 산 자락에 위치하여 지사, 갈마, 청량, 간월, 회포 등 5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동쪽은 서산만과 인접해 있어 바지락과 실치를 비롯한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인천을 왕래하는 여객선의 요로였으나 1984년 대호방조제가 축조되어 대규모 호수와 함께 엄청난 규모의 농경지가 형성되어 인근 주민에게 분배되었고, 복잡했던 해안선의 모습은 모두 사라졌다. 운산리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조선 후기까지 금생동(金生洞)으로 되어 있었다. 금생동은 망일산을 가운데 두고 매남리를 제외한 대산리 지역과 운산리 전체를 하나로 묶어 지칭한 매우 넓은 마을이었다. 1895년 행정구역개편 때 현 대산리를 산전리로, 운산1·2리를 산후리(山後里)로, 운산3·4·5리를 운전리(雲田里)로 분리하였다. 그 후 1914년 일제치하에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산후리와 운전리를 합하여 운산리라 개칭하고 대산면에 편입시켰다.
영탑리(令塔里) 영탑리는 영전과 탑동의 두 마을이 합쳐져 이뤄진 마을로 대산읍의 관문에 위치하며 영전이라 하면 삼형제봉, 건직산이 동서로 길게 자리해 서풍과 북풍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 온화한 기온이 유지되는 곳을 뜻하며,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 사람살기 좋은 지역으로 의성 김씨, 담양 전씨가 일찍이 입향해 집성촌을 이루고 누대에 걸쳐 평화롭게 살아오고 있다. 여지도서(1765년 편간)에 따르면 영전리는 106가구에 332명, 탑동리는 67가구에 195명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당시로서는 많은 인구가 살았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영탑리는 조선시대에 영전리와 탑동리 일부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영전리의 ‘영’, 탑동리의 ‘탑’을 합쳐 현재 영탑리가 되었으며 이후 대산면에 편입되었고 후에는 영탑1,2리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었는데, 영탑1리가 바로 영전리이고, 영탑2리가 바로 탑동리이다. 영탑2리에 풍림아파트가 들어서면서 1995년부터 인구증가로 인해 풍림아파트 지역이 영탑3리로 분리되어 현재의 3개 리로 구성되어있다.

[출처] 대산읍지(2012.11.16.발행), 대산읍지발간 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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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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