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봉면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없었으며 이 지역에는 서산군 문현면과 영풍창면이 있었다.1895년 행정구역 개편시 노지면의 금곡리 마전리 태안군 동일도면고역리등이 영풍창면에 편입되었다.
또 고파도리가 일부는 문현면소속이고 일부는 태안군 북일면 소속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모두 합쳐서 태안군 북일면 소속으로 단일화되면서 태안군 소속이 된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영풍창면과 문현면 그리고 태안군 불일면소속으로 바뀌었던 고파도와 태안군 동일도면 고굴리, 역리의 일부씩을 분할 합하여 면내에서 가장 높게 우뚝선 팔봉산의 이름을 따서 서산군 팔봉면이 되었다.
마을명 | 마을유래 |
---|---|
금학리
(金鶴里) |
금학리(金鶴里)라는 이름은 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생긴 지명이고 조선조 때는 서산군 노지면 금곡리와 마전리로 있었던 것을 구한말인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노지면소속으로 바뀌면서 영풍창면(永豊倉面) 금곡리(金谷里) 마전리 (麻田里) 소길리(小吉里)로 되었었다.
그후 1914년 개편 때에는 영풍창면(永豊倉面)과 문현면(文峴面)이 합쳐져서 면내 중심에 우뚝솟은 팔봉산(八峯山) 이름을 따서 면명으로 할 때 금곡리, 마전리, 소길리, 그리고 문현면 우길리일부를 합쳐 금학리(金鶴里)라 하였는데 이때 이름은 금곡리(金谷里)에서 금(金)자와 마을내 자연부락명인 추학(秋鶴)에서 학(鶴)자를 따서 금학리(金鶴里)라 한 것이다. |
양길리
(陽吉里) |
양길리(陽吉里)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부터 생긴 지명이다.
4∼50년전만 하더라도 뱅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뱅길이에는 장(場)이 섰었기 때문에 팔봉, 성연, 지곡등 인근에서는 이 장(場)을 많이 이용했던 것이다. 뱅길이장은 평상시에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지만 장날이면 수십명의 보부상들이 이곳을 찾아들어 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구한말인 1895(고종32)년의 행정구역 개편전까지 조선시대에는 문현면 방길이라는 이름으로 75호가 넘는 비교적 큰 마을이었던 것을 이 때에 방길리(方吉里) 우길리(牛吉里) 사양리(斜陽里)로 분할되었다가 1914년에 다시 방길리(方吉里) 우길리(牛吉里) 일부를 합쳐서 사양리(斜陽里)에서 양(陽)자를 따고 뱅길리(方吉里)에서 길(吉)자를 따서 양길리(陽吉里)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
호리
(虎里) |
호리(虎里)는 조선조때까지는 호두리(虎頭里)였다.
1895년 구한말엔 내호두리(內虎頭里)와 외호두리(外虎頭里)로 바뀌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이 두동리가 합쳐져 호리(虎里)로 되었다. 이러한 지명은 호랑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호리 1구2반의 지형생김이 흡사 입을 크게 벌린 범머리와 같아서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
어송리
(漁松里) |
어송리(漁松里)란 이름이 생긴 것은 1914년 일제 강점기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생긴 것이다.
이 마을도 금학리, 진장리와 같이 2개면 이상의행정구역이 변경, 합쳐지면서 생긴 지명이다. 조선조때에는 어송리1구인 송치리는 문지고개면내지 문현면소속으로 있었고, 2.3구가 되는 정자리와 어은리는 영풍창면 소속이던 것이 구한말과 1895년의 행정구역개편때에 송치리가 영풍창면소속으로 바뀌면서 한 면(面) 소속으로 되고 어은 리(於隱里)라는 마을이름도 어조사 어(於)자의 어은리(於隱里)에서 고기잡을 어(漁)자로 쓰는 어은리(漁隱里)로 변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어은리 송치리 정자리를 합쳐서 하나의 마을인 어송리라 한 것이다. |
대황리
(大黃里) |
대황리(大黃里)는 조선조때까지는 대동리와 지파동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구한말 1895년에는 대동리, 황곡리로 구분되고 1914년 일제 강점기의 행정 구역 개편때에 대동리, 황곡리가 합해지고 방길리 일부를 떼어 붙여져서 대황리가 되었다.
대황리는 북쪽에 서산지방에서는 명산으로 꼽는 해발234m의 연 화산을 두고 남서로 펼쳐진 마을이다. 자연마을로 대표적인 지명으로는 황골이 제일 유명하다. 그러나 왜 황골이라 했는지 그 의미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은 고산심곡 지대로서 으름, 머루, 다래덩굴과 함께 온갖 관목류의 나무들이 늘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가을이면 붉게 단풍이 들어 가히 절경을 이루었으므로 이에서 연유 황골(黃谷) 이라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 것이다. |
고파도리
(古波島) |
고파도(古波島)에 거주하는 이만우씨에 의하면 구 서산군 지역과 구 태안군 지역은 동서(東西)로 길게 구분되었었다 하고 지금까지도 전언에 의하여 확인할 수가 있다고 한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에는 10가구에 21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하고 인구가 가장 많았던 60년대에서 70년대초 까지만 하여도 70여가구에 335명의 주민이 사는 큰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이곳도 도시로 모두 떠나고 38세대에 10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
흑석리
(黑石里) |
흑석리(黑石里)는 조선조때까지는 문현면 흑석리와 잉복리로 되어 있던 것이 구한말인 1895 년에는 잉복리는 두마을로 분활 잉복리와 월곡리로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흑석리와 구잉복리일부인 월곡리가 합해져서 팔봉면 흑석리(黑石里)가 되었다.
그런데 잉복리였던 지곡면 연화리 중절마을과 흑석리 반월 마을의 사이고개를 고로(古老)들은 "내봉재"라 한다는 것을 보면 잉복리는 내복리의 오기인가도 생각된다. 흑석리(黑石里)는 원래 흑석리 2구만을 지칭하던 마을 이름으로서 흑석리 2구1반의 들(野) 가운데에 볏섬만큼이나 큰 검은돌이 있었기에 생긴 지명이었는데 언젠가 논밭을 정리하고 넓히는 과정에 없어졌다고 마을사람들은 전한다. 그러나 혹 어떤사람은 대황리 2구 작은말 바닷가에 있는 높이4m, 넒이10m는 되어 보이는 검고 큰 바위가 있는데 이에서 유래되어 ''검은돌(黑石)''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덕송리
(德松里) |
덕송리(德松里)는 조선조때까지는 덕동리(德洞里)라는 이름으로 되어 왔었다.
구한말인 1895년의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덕동리, 상송리, 하송리 등 3개리로 나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덕동리, 상송리가 합해져서 덕송리(德松里)로 변한것으로 문헌상 기록이 있다. 이에는 의문사항이 몇가지가 된다. 1895년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상송리와 하송리가 덕동리에서 분할되어 생긴마을인지,송치리에서 분할되어 상송리와 하송리가 나온것인지 현재에는 어느것도 속단할 수가 없다. 상송(上松)은 옛 송치리(松峙里)와도 접속되어 있고 솔송(松)자가 붙은 이름이기 때문에 송치리(松峙里)에서 분할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리가 되는 것이다. |
진장리
(榛檣里) |
진장리는 조선시대에는 영풍창면 고성리, 장북리 및 태안군 동이도면 굴포리, 역리등으로 되어 있었다.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영풍창면 진산리, 고성리, 장북리로 바뀌었고 태안군 동이도면이 동이면으로 되고 굴포리, 역리는 역리와 고굴리로 바뀌었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영풍창면 진산리, 고성리, 장북리를 합친 외에 태안군 동이면 역리와 고굴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진산리에서 진자를 따고 장북리에서 장자를 취하여 팔봉면 진장리가 되었다. |